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들에게 정신병 진단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의사들은 어떻게 "넌 우울증이야, 조현병이야, 사회불안장애야"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바로 DSM(미국 정신의학회에서 출간)과 ICD(세계 보건 기구가 출간)라는 편람을 보고, 거기 나와 있는 진단 기준에 맞다면 진단을 내리게 됩니다.
2020/06/21 - [심리학/심리학 일반] - 정신병 진단받고 오히려 안도하는 이유?
이 글에서 정신병 진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소개해 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정신병 진단 자체가 이런 이름 붙이기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진화적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경계합니다. 비정상 행위를 하는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집단을 위협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러한 비정상 행위를 하는 것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름을 붙이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예상할 수 있도록 통제감을 줍니다.
인간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이름을 붙인 비정상 행위들을 범주화시킵니다. 그리고 이 범주들을 다시 여러 종류로 묶고 이에 대한 설명을 찾습니다. 통제'감'을 넘어 실제로 이런 것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요.
오늘은 구체적으로, DSM의 변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볼 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DSM을 기준으로 진단하고 있고, 세계적으로도 DSM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DSM이 이 오늘 이야기하는 진단에 대한 이야기에 더 맞기 때문입니다.
앨런 프랜시스(DSM-Ⅳ 총책임자)는 DSM이 신뢰도가 높고 자세하여 선진국에서 더 많이 사용되며, ICD는 좀 더 단순한 체계를 필요로 하는 개발 도상국에 알맞다고 서로 간 장단점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는 ICD가 정신분석적 접근에 친화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최초의 집단지능검사(알파 테스트와 베타 테스트)가 전쟁 수행을 위해 개발되었듯,
최초의 DSM인 DSM-Ⅰ 역시 전쟁 수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계대전을 치루며, 미군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지능"과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교적 정상"인 수준의 병사를 원했습니다.
예컨대 전쟁을 치룰 때 심한 정신병 환자가 아군을 향해 총을 쏘면 어떻게 될까요? 전투력 손실, 사기 저하, 경제적 비용 등 문제가 매우 심각해집니다.
따라서 미군은 이러한 사람들을 군대에서 걸러내야만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미군에 소집되었고, 이들을 걸러내기 위한 진단을 만들게 됩니다. 즉, 처음 어떤 사람들을 징집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들이 더 이상 임무 수행을 할 수 없는지 등 전쟁에 적절한 병사들과 전쟁에 적절하지 않은 병사들을 분류해내려 했습니다.
이렇게 군대는 정신병에 대한 진단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이 진단 체계를 나중 국가보훈처가 개정(보훈처 기술고시 의료 203)했고, 이 의료 203을 다시 미국 정신의학협회가 개정하여 만든 것이 DSM-Ⅰ입니다.
1차 세계 대전이 1914년~1918년, 2차 세계 대전이 1939년~1945년입니다.
이를 고려하면, DSM-Ⅰ이 1952년 출간된 것이 이해가 되실 수 있겠습니다.
이후 별다른 개정 없이 1968년 DSM-Ⅱ가 출간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의 대세는 정신분석이었습니다. 프로이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죠. 이에 DSM-Ⅰ,Ⅱ는 당시 시대 흐름에 맞춰 정신분석에 근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그런데 1973년, 로젠한 실험으로 유명한 <정신병원에서 정상으로 살아가기>라는 제목의 논문이 출간됩니다. 이 논문은 스탠포드 대학교 교수였던 데이비드 로젠한 DSM체계에 의문을 갖고 1968년부터 1972년 8명의 가짜 환자를 12개의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던 실험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로젠한은 자신의 대학원생들을 병원에 가서 환청이 들린다고만 호소하라고 지시했는데(아... 여기서도 대학원생은...), 가짜 환자들은 1명도 빠짐없이 정신 병동에 입원하게 됩니다. 또한 이들은 입원 직후에는 정상적으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주에서 몇 달까지 병원에 억류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로젠한은 당시의 DSM-Ⅱ가 쓸모없다고 비판합니다.
이 실험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의구심을 갖습니다. "뭐야? 정신병이라는 게 진짜 있기는 한 거야?"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신뢰도입니다.
같은 사람을 누가 진단해도 동일한 진단이 나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정신의학협회는 로버트 스피처에게 DSM-Ⅲ를 만들라 지시하며 모든 권한을 줍니다.
로버트 스피처는 앞서 언급한 신뢰도를 키우기 위해 누구나 다 동일하게 할 수 있도록 정신병에 대한 목록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귀납적 추론 방식이지요.
즉, '어떤 어떤 증상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종류의 병이다.'라고 범주화를 시키면서 차례차례 정신병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런 과학적 증거가 있었을까요?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DSM-Ⅰ,Ⅱ가 비판받은 이유가 모호했기 때문인데요, 정의가 모호하면 연구가 될 수 없습니다. 과학적 증거는 연구를 말하는 것인데, 이런 이유들로 매우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스피처는 각 장애마다 소규모 전문가 집단을 꾸려 토론을 시켰습니다. 전문가 집단이 토론해서 장애의 정의가 합의에 이르면, 장애와 그 장애의 정의를 DSM-Ⅲ에 넣었습니다. 합의가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서요. 아주 오랜 시간 토론을 해도 결론이 안 나면 어떻게 했을까요?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나라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인가 봅니다.
실제로 당시 DSM-Ⅲ 작업에 참여했던 앨런 프랜시스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논쟁이 지속될 때는 누구든 제일 목소리가 크고, 자신만만하고, 고집스럽고, 나이가 많고, 밥(로버트 스피처)에게 마지막으로 말한 사람이 유리했다. 이것은 진단 체계를 개발하는 방식으로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온갖 종류의 편향이 끼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여기서 현재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는 '정신병에 대한 접근법'에 대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로버트 스피처와 DSM을 만드는 사람들 대부분 젊은 급진론자였고 이들은 정신병에 대한 생물학적 원인론에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DSM-Ⅲ 생물학적 원인론을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DSM-Ⅲ의 변화는 생물학적 원인론 vs. 정신분석의 싸움에서 생물학적 원인론의 승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를 생각해볼까요? DSM-Ⅰ,Ⅱ 까지는 정신분석이 대세였다고 말씀드렸죠. 하지만 조금씩 정신분석에 대한 회의감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런 변화에 결정타를 먹인 것이 DSM-Ⅲ라 볼 수 있는 것이죠.
이렇게 1980년 DSM-Ⅲ가, 7년 뒤 1987년 DSM-ⅢR이 출간, 다시 7년 뒤 1994년 DSM-Ⅳ, 6년 뒤 2000년 DSM-Ⅳ-TR, 13년 뒤 2013년 DSM-5가 출간됩니다.
현재 2020년 기준, 정신병을 진단할 때는 DSM-5를 사용합니다. DSM은 지속적인 개정을 거쳐 여러 정신병이 추가되고 일부 개정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원인론을 이어나갑니다.
생물학적 관점은 자연스레 "약"과 연결됩니다. 즉 '뇌의 뭐가 이상해져서 정신병이 들었으니 약을 먹으면 된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정신병에 대한 생물학적 원인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있음을 여전히 유의해야 합니다. 다른 쪽에 속한 전문가들은 정신병에 대한 생물학적 원인론이라는 시각 자체가 약을 팔려는 제약회사의 영향력 때문이라며 비판합니다.
즉, 정신병에 대한 원인론을 다르게 접근하는(주로 정신분석적 접근) 전문가들도 상당수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정신병의 원인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클릭
대표적인 예로, 역동정신의학 진단 매뉴얼이 있겠네요.
DSM을 통한 정신병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습니다.
현재 DSM-5가 DSM-Ⅲ이후 극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DSM-5역시 생물학적 원인론을 따르고 있죠.
요약하면,
정신병에 대한 생물학적 원인론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토론을 통해 어떤 장애와 그 장애의 진단 기준을 만들어냈다
정도가 되겠네요.
(이 글은 지속적으로 수정,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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